한신대 퇴임식 설교
주께서 쓰려 하신다!
막 11:1-11
https://blog.naver.com/yunej51/221282273354
1. 행복한 어린 나귀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동물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동물이 무엇일까요?
나는,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에 등장하는 어린 나귀가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귀는 큰 광장에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 나귀는 길거리에 인접한 어느 문 앞에 매어 있었기 때문에 행인들의 눈에 띄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나귀는 크고 힘센 나귀가 아니라, 아무도 태워본 일이 없는 어린 나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 나귀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나귀를 찾아 끌고 오려 했습니다. 나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웬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쓰려 하십니다.”
그렇게 그 나귀는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고, 어떤 사람들은 잎이 많은 나무 가지들을 꺾어서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는 “호산나” 소리치며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환영하는 축제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입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하면서 그렇게 소리치며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그 길을 어린 나귀가 주님을 등에 태우고 걸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린 나귀는 잊혀 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나귀가 아니라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나귀는 뜻밖에 선택되었고, 그의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그에게 허락된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그 어린 나귀가 성서 한 모퉁이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나귀가 기대조차하지 않았던 영광일 것입니다. 설령 성서를 읽는 독자들마저 그 나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27년의 교수직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그 어린 나귀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주님의 말씀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주님께서 쓰려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어린 나귀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주님께서 쓰셨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나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2. 회고
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피난민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 여파로 나는 청년시절까지도 질병과 가난으로 시달렸습니다. 나는 절망하여, 서른 살까지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삶을 죽음처럼 살아가던 내가 44년 전에, 한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특히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한신에서 나는, 단 한 번 밖에 허락되지 않는 삶을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고 배웠습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이미 구원받은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역사의식을 지닌 주체로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나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시켰습니다.
그 깨달음 덕분에 삶이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그 덕분에 꿈과도 같이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뜻밖에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할 길도 열렸습니다. 유학생활은 힘겨웠지만, 수많은 학문적 자극들을 체험하는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신학에서는 서구 기독교가 저지른 악행들, 특히 반유대주의가 낳은 비극들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독교가 버리려 하였던 히브리 신앙의 유산들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꿈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 혁명에 대하여 꿈꾼 레온하르트 라가츠와 그의 동료들인 종교사회주의자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 칼 바르트, 그리고 그의 신학 노선을 충실하게 계승하려던 헬무트 골비처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르크바르트의 신학세계가 나의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그리고 교육학에서는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교육적 기여를 모색하는 평화교육론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나의 정신세계를 정화시켜주었습니다. 역사학에서는 나치의 유산을 극복하려는 학문적 노력들이 나의 역사의식을 자극했습니다. 이 모든 학문적 자극들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한신에서 대학원까지 마치면서 나름대로 꽤 진보적인 학문세계에 들어섰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체험한 학문적 충격들은 내가 얼마나 협소한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에 불과한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진보는커녕 나는 여전히 중도 우파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베를린에서 학문적으로 철저히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깨달음들을 어떻게 기독교교육학으로 풀어나갈지 고심하는 것이 나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교수로서 나는 두 가지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교육학과 평화교육학의 이론 체계를 세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후배들이 기독교교육자로서 사명감과 실력을 갖춘 일꾼들로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27년 동안 내 꿈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 했습니다. 첫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 나의 연구 성과들은 네 권의 학술서적들과 두 권의 번역서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물들은 열 한권의 <강의 자료집>들에 담아 두었습니다. 이 <강의자료집>들은 물론 내가 담당했던 강의들과 세미나들에 참여한 수강생들을 위해 만든 것이지만, 훗날 내가 만날 수 없을 후배들에게도 학습 자료로 제공되기를 희망하면서,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입니다. 이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절판된 두 권의 학술서적 복사본과 11권의 <강의자료집>들을 학교 앞의 <삼원복사>에서 구하여 읽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신을 떠나는 나의 발걸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마치 마라톤 선수가 결승선을 바라보면서 느끼게 될 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우리의 삶과 사명
은퇴를 앞둔 나에게 기쁨을 주는 또 한 가지는, 내가 이미 3년 전에 번역을 완료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II/3)이 마침내 출판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출판사의 사정으로 지연되었으나, 이제 7월 초가 되면 책으로 출판될 것입니다. 내가 번역한 부분의 내용은 “섭리론”, “무(無)론”(= 악의 세력에 대한 이론), “천사론”입니다. 기독교교육학 교수가 조직신학 서적을, 그것도 칼 바르트의 섭리론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것으로 교수직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겠지요?
섭리론은 아마 여러분에게 낯선 개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한 세계변혁, 즉 '하나님의 나라 혁명'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뜻에 저항하는 모든 악의 세력에 맞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관철하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지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에 헌신하도록 피조물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름조차 없는 작은 피조물들도, 어린 나귀도, 그리고 모든 인간이,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나라 혁명을 완성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보존되고 활용됩니다. 우리의 만남도, 각자가 엮어가는 삶의 여정도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바로 그(하나님)가, 불행한 피조물의 행복한 하나님이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피조물과 함께 불행하기를 원한다.” 악의 세력에 의해 고난 받는 피조물과 함께 고난 받는 하나님! - 바로 이 하나님이 바르트가 만난, 인간과 전혀 다른, '전적타자'인 초월자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피조물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고난 받는 피조물을 해방하기 위하여 부조리한 현실을 철저히 거부하고 심판하시는 혁명적 급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적대자들의 소굴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길에서 주님을 위한 조력자로 선택된 것이 바로 어린 나귀였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또 언젠가 사람을 보내어 여러분을 찾으실 것입니다: “주께서 쓰려 하신다!” 여러분이 언제 이 말씀을 듣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쓰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성서의 증언에 따라 판단할 때에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눈여겨보고 계시며, 하나님의 나라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쓰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쓰시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어떤 준비를 하여야 하겠습니까? 먼저,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닮은 인격을 형성하려 노력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무장하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일꾼으로 성숙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일을 위하여 요긴하게 쓰이는 어린 나귀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태우고 묵묵히 그리고 겸손히 그 고난의 길에 참여하는 행복한 나귀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4. 마치는 말
젊은 시절에 나는 낙엽이 지는 것을 볼 때마다 허망함과 서글픔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노년에 접어들면서 나는, 낙엽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낙엽은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나뭇잎으로서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낙엽이 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새싹들이 돋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한신대학교라는 나무를 떠나는 행복한 낙엽입니다. 내가 떠난 자리에서 더 많은 새싹들이 움트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은퇴하게 되었다니까, 나의 앞길에 대해 염려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수직에서 물러나지만, 학자의 삶에서 은퇴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삶이 허락되는 동안, 주님께서 나를 쓰시는 동안, 나는 주님의 뜻을 더욱 바르게 깨닫고 증언하기 위하여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더욱 자유롭게 그리고 더욱 여유 있게 나에게 허락된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저 어린 나귀는 단 한 번 주님을 등에 태우고 걸어갔으나, 나는 앞으로도 계속 주님만을 등에 태우고 걸어가겠습니다. 여러분 또한 그러하기를 기대합니다. (2016.6.3.)
* 퇴임식 관련 자료는 다음을 참고하시오: https://blog.naver.com/yunej51/22128226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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