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대학교회 설교
2011.10.30.
제사장이 많아지면 죄도 더 많아진다!
호세아서 4:1-10
1.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대학교수인 마르틴 루터 신부가 비텐베르크 성 안에 있는 교회정문에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촉발시킨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물론 마르틴 루터가 처음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루터보다 약 140년 전인 1370년대 초에 영국의 신학자인 위클리프(1325?-1384) 신부는 타락한 성직자들이 지니고 있는 세속적 재산을 황제가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378년에는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중세교회체제 전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세상의 권력을 거머쥐고 부에 혈안이 된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교황제도를 폐지할 것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는 1384년에 사망하였는데, 사망 후에 파문되었습니다. 그가 사망한지 44년 후(1428년)에 교황청은 그의 유해를 파내어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념은 멀리 체코의 프라하로 전해졌습니다. 대학교수인 얀 후스(1372/1373?- 1415) 신부는 위클리프 사상의 영향을 받아 체코의 종교개혁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결국 위클리프의 가르침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교황청은 그를 파문하고 화형에 처했습니다. 후스가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처형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후스가 처형된지 102년 후에 34세의 젊은 루터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유럽 전체로 확산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은폐하고 왜곡시킨 복음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기 전에 먼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야 하겠습니다.
2. 제사장 종교와 예언자 종교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 - 약 2700여 년 전, 북왕국 이스라엘에 나타난 예언자 호세아는 그가 살던 시대의 사회상을 이렇게 폭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제물을 원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실’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분입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므로, ‘진실’도 ‘사랑’도 없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없으니 저주와 사기만이 남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니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만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도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는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복을 내려주시기를 빌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을 통해서 희생제물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환심을 사서 자신들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이 부릴 수 있는 우상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렇게 타락하게 것은 제사장이 제 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질책하십니다. 제사장들은 죄를 백성들에게 전가시킬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지도자라는 자들이 저지르는 악폐로 인해 오히려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5절에 기록된 ‘예언자’란 제사장과 함께 성전제의를 담당하던 직업 종교인을 의미합니다. 이 직업적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데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제사장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7-8):
“제사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죄도 더 많아지니, 내가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겠다. 그들은 내 백성이 바치는 속죄제물을 먹으면서 살고, 내 백성이 죄를 더 짓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백성이나 제사장이 똑같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종교제도가 발전하여 성전에서 제사 업무를 관장하는 제사장들이 많아질수록, 성전조직이 활성화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더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제사장들이 짓는 죄도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제사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깨우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8절 말씀에 따르면, 제사장들은 이러한 본연의 사명과 의무에 충실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이 더 죄를 짓기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바치는 희생제물이 제사장들의 소유물로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탐욕에 눈이 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소행과 행위에 따라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0절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만족을 느낄 수 없을 것이며, 헛된 정욕과 향락만을 추구하면서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가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호세아는, 제사행위만으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진실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밖에도 여러 곳에서, 제사행위를 강조하는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할 것을 촉구하는 예언자들 사이의 대립과 긴장관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대표적인 것이 예언자 아모스와 제사장 아마샤의 대립입니다. 아모스는 호세아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도 성전제사를 중시하던 당시의 관습에 저항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아모스서 6:21-25):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결국 아모스는 베델 성전의 제사장 아마샤에 의해 반란을 선동하는 자로 고발당하게 됩니다(암 7:10이하). 제사장 아마샤는 여로보암 왕과 결탁하여 아모스의 입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의 예언은 50년이 지나지 않아 성취되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했고 제사장들마저 몰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남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하고 말았다고 비판하였습니다(렘 7:1이하).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성전에만 의지하여 안도감을 느끼려는 자들에게 환상을 깨라고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예언자 전통과 제사장 전통의 결정적인 대결은 예수님과 대제사장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서 극에 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희생제물들을 판매하는 자들과 환전상을 내쫓았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레미야의 성전비판을 인용하셨습니다(마 21:12-13). 이것은 성전제사를 빙자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챙기던 대제사장의 성전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대제사장에 의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지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말하였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분노하였습니다(마 26:65). 그는 하나님을 위해 분노한 것이 아니라, 실제는 자신의 권력과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입니다. 결국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메시아를 처형하도록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마 27: 51). 성전 휘장은 평신도들이 모이는 성소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성전종교, 즉 희생제물로 배를 채우던 제사장들의 종교가 영원히 폐기처분된 것입니다. 실제로 40년도 지나지 않아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들의 무리는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유대교를 이끈 것은 성전종교의 실권자들인 제사장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랍비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유대교에는 성전도 제사장도 없습니다. 물론 희생제물도 드리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랍비들입니다.
초대교회도 성전 없이, 제사장 없이, 희생제물 없이 다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사랑의 친교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것은 더 이상 희생제물과 제사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니다”(5);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9)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귀족을 만들어내던 제사장 제도는 철저히 폐기되었습니다. 모두가 제사장처럼 살아야 하므로 제사장이라는 직책 자체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3. 루터의 투쟁: 제사장 없는 종교로!
로마제국에서 오랫동안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종교로 승인된 것은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였습니다. 그 후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자리를 잡으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교회조직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교황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교황제도는 기독교가 제사장 종교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 결과 제사장 종교가 갖는 온갖 비리와 부패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황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거나 묵인되어야 했습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사제들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거대한 가톨릭 교회체제를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교리들이 만들어졌고, 연옥에 대한 공포와 죄의식이 강조되었습니다. 그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적 업적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교황청의 권위나 가르침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려서 처형되었습니다.
루터 시대에 로마 교황청은 베드로 대성당을 수리하기 위해 “희년(禧年) 면죄부”를 판매하였습니다. 면죄부는 본래 돈을 지불함으로써, 죄로 인해 현세에서 받아야 할 징벌의 일부인 고행을 면제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희년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서 설교자들은 협박과 감언이설을 늘어놓았습니다. 테첼이라는 유명한 설교가는,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며 헌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외쳤습니다. 심지어 그는 말하기를, 헌금을 하기만 하면, 죽어서 연옥에 있는 부모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면죄부 판매는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한 회개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반박문 제1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면죄부를 사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죄에 대한 용서를 선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반박문에서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오늘날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Crassus)보다도 훨씬 부자인 교황이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돈으로 이 성 베드로 사원을 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반박문 제86조)
그리고 이렇게 묻기도 했습니다:
“이미 전적인 회개를 통해 완전한 구속과 축복을 받은 이들에게 교황은 또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을 축복하겠다는 것인가?”(반박문 제87조)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사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으나, 당시에는 교황청의 권위와 이권을 침해하는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마침 마인츠 지역의 대주교는 고위 성직으로 빨리 승진하기 위해 교황청에 그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큰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면죄부 판매액의 절반을 자신의 부채를 갚는 데에 사용하기로 교황청과 합의했으므로, 면죄부 판매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루터의 반박문에 분노하여 루터의 글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습니다. 또한 당시에 발달하기 시작한 인쇄술 덕분에 루터의 글은 2주일 만에 독일 전역으로 배포되었습니다. 이로써 다만 신학논쟁을 시도하였던 루터의 반박문 게시는 교황청이 개입하여야 하는 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하도록 회유하였으나, 루터는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습니다. 파문이란 그 사회에서 더 이상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그는 언제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1521년 4월 18일, 독일 황제가 보름스에서 개최한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또 다시 그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취소할 수 없으며 또 취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안전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결국 황제는 루터가 제국에서 신앙의 기초를 훼손하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보름스 칙령(1521년 5월 26일)을 공포했습니다: “마틴 루터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정원에 받아들이지 말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말 것이며, 그를 숨기지 말고, 은밀하게나 공공연하게 말로나 행위로써 그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추종하거나 지지하거나 혹은 원조하지 말 것이다. 그를 잡을 수 있는 곳에서는, 그를 붙잡아 제어하고, 생포하여 단단히 결박한 다음 그를 우리에게 압송해야 한다.”
루터는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하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는 성서번역을 통해서 교황이나 사제들의 도움 없이도 모든 평신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종교개혁 운동은 교황청과 황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유럽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종교개혁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개신교입니다. 이로써 이제 “제사장들, 제물들, 은총을 얻기 위한 수단들, 예식들이 없는” 종교, 즉 “정신적인 종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로써 종교개혁은 복음의 전통으로 되돌아가려 했다는 의미에서는 ‘개혁’ 운동이지만, 제사장 종교체제로 굳어진 교회조직과 권위를 철저히 거부하고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였다는 의미에서는 ‘혁명’ 운동이었습니다(하르낙). 이제 성직제도 전체가 폐지되었고, 따라서 성직자들에 대한 순종도 더 이상 요구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든 형식적인 제의들이 폐지되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말씀 선포, 그리고 기도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죄의식과 헌금을 강요하고 금식과 금욕을 강조하던 관행도 폐지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교회, 그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지탱되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삶의 지침을 찾는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개신교의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라, 예언자와 사도들의 전통을 잇는 루터의 정신에 합류하는 사람들입니다.
4. 개혁하는 교회!
이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거의 500년이 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 교회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운동이 거꾸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개신교가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일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개신교의 존재의의가 이미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개신교 교회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교인들에 대하여 일반 사회인들이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제기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문제제기가 혹시 저 젊은 루터가 제기하였던 것과 닮은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계속 변화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부패한 종교집단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를 서구사회에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릅니다. 이 말의 어원은 ‘항의’ 혹은 ‘이의신청’을 의미하는 라틴어 프로테스트(Protest)에서 왔습니다. 개신교도들은 교권주의에 저항하여 항의하는 사람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루터처럼 이의를 제기하고 루터처럼 투쟁하고 루터처럼 교회를 새롭게 세우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예언자 전통 위에 서서 우리 사회의 변혁을 주도해 왔습니다. 올해 우리 교단의 슬로건도 “주여, 이 땅을 고쳐주옵소서!” 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교단의 교회들도 종교개혁 정신 위에 바르게 서 있는지, 더 나아가 성경말씀의 전통 위에 바르게 서 있는지 심각하고 정직하게 질문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길을 계속 걸어가도록 서로를 향하여 강력히 촉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교단의 슬로건을 제창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주여, 우리 교단을 고쳐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교회갱신을 목표로 창립된 우리 대학교회도 진정으로 종교개혁 정신 위에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더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널리 선포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진실과 사랑이 이웃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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