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대학교회 설교
2012.3.25.
“오신다는 분이 당신입니까?”
눅 7:18-23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사순절 절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삶과 고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께서 왜 고난을 받아야 했을까요? 단지 당시의 인간들이 무지했기 때문일까요? 혹은 우리들보다 더 사악했기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은 당시에 매우 이례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만이 아니라,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만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베드로마저도 예수님과 견해차이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에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겁이 나서가 아니라, 그의 길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소개하였던 세례자 요한마저도 예수께서 과연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 맞는지 질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한이 제기한 이 질문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요?
2. 세례자 요한의 질문
세례자 요한은 주님보다 앞서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갖추도록 계몽하였던 예언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으로는 신앙인이라지만 사실은 그릇된 삶을 살고 있다고 폭로하였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지금까지 살았던 생활방식으로부터 철저히 방향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는 그의 요구는 단호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3:7-14):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7-9)
그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3:17): “그는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그의 경고는 위협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므로, 기쁜소식이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당시 그 지역의 왕으로 있던 헤롯 안티파스의 악행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제자 두 사람을 보내어 예수께 질문하게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여기에서 요한이 ‘두’ 제자를 보내는 것은 유대교와 초대교회의 관습과 일치합니다. 무엇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제기한 질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요한은 이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하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그의 제자들이 제기한 의심을 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 했던 것일까요?
만일 의심을 풀려는 것이라면, 의심을 갖게 해준 원인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 오실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엄격한 심판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로운 사랑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지배자들을 내치고 그 자리에 군림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예수께서는 힘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급격한 사회변혁이 실현되리라 기대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는 일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요한은 자신의 사명과 사역이 헛되지 않았나 의심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처형을 앞두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하여 절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식한 것이 착각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으로서 그는 충분히 그렇게 회의하고 절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령 그가 그렇게 회의하고 절망했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탓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입장에 있었다면, 우리 역시 그런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와 마찬가지로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고 해도, 신앙인들은 자주 그런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곤 합니다.
수많은 교회들과 신앙인들이 박해 가운데서, 고난 가운데서, 암담한 현실에 직면해서 요한처럼 질문하여야 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가?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난의 한복판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고통을 당할 때에, 그들을 괴롭히는 마지막 유혹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헛된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지녔던 사명과 내가 감수하였던 고난이 헛된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들은 사실 고통자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한이 그런 회의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그의 신비로운 출생과 그가 지녔던 불타는 사명감에 비추어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는 그의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음 앞에서 갑자기 나약해졌으리라 추측하는 것도 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예수께 질문하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아마 그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온건해보이는 선교활동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스승인 요한을 감옥에서 구출할 수 있는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는 제자들을 설득하는 대신에, 요한은 그들을 예수께 보내어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게 하려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요한 자신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의심했다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질문하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의심스러운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바로 예수께 보냈습니다.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께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질문은 그의 제자들의 질문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회의와 절망감 혹은 실망감에서 비롯된 질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재확인하게 하려는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그리스도의 길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이기도 했습니다.
3. 예수의 대답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하기 위하여 예수께 왔을 때,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사역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고쳐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21).
예수께서는 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께서는 질문에 대하여 어떤 논리적인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보고 들은 것”을 알려주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의 내용은 결코 어떤 사회혁명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립투쟁을 위해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일들은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벙어리)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급격한 사회변혁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들은 사소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사소한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들이야말로 바로 구약성서에서 예언된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징표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구원의 시대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사 35:5-6):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여기에서 ‘보고 듣게 되는 것’이 구원의 중요한 표징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보고 듣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특히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바르게 들어야 바르게 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38:13-14에는 다음과 같은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아예 귀머거리가 되어 듣지 않았고, 벙어리가 되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나는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되었고, 입은 있어도, 항변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비인간적인 고난의 상황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듣게 된다는 것은 바로 구원받은 표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으로 인해 가능하게 되고 있는 일들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이 선포한 약속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표현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이 선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은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촉진시키는 철저하지만 부드러운 혁명운동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최후심판을 단행하는 권위 있는 심판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당혹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심판의지를 능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치유해주는 따뜻한 손길을 통해서 구원의 시대가 동트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낮아졌고, 세상의 지배자들과 악행을 자행하는 자들을 심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 의해 심판받고 패배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실망시키는 모습으로 그렇게 십자가에서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요한과 요한의 제자들이 기대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기대에 맞추려 하기보다는, 그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질문을 제기한 그들을 신앙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신 일을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에 합류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지금 주님의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청한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걸려 넘어지게 된다’는 말은 ‘화를 내게 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어 성경(루터역)에서는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번역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걸림돌처럼 되었습니다.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 그 걸림돌에 대하여 화를 내는 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대제사장도, 사두개인들도, 헤롯왕도,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긴 것이 아니라 다만 걸림돌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걸림돌이 된 예수님을 제거하는 일에 합세하였습니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걸림돌이 된 이유는, 결코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구원사역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악한 자들에 대한 단호한 심판을 미루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의로운 예언자 요한이 처형당할 위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하였을 것입니다.
4. 맺는 말
우리는 요한보다 더 잘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과연 요한의 제자들을 화나게 하였던 그 예수님을 향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과격한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들처럼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이며 구원자가 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화를 낼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이 화를 내야 했던 그 이유에 대해서는 - 사악한 지배세력에 대한 심판이 즉시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 결코 화를 내지 않는 교회들과 신앙인들도, 요한이 결코 화를 낼 이유를 찾지 못하던 것에 대해서는 -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 화를 내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새우젓 장수 아주머니’의 말을 잊지 못합니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로 기억되는데, 당시에 저는 교회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우리 집에 새우젓이 떨어질 때 쯤 되면 언제나 그 아주머니가 찾아 왔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아주머니가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큰 교회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는 참석하지 못하고 새벽기도시간에만 교회에 나간다고 했습니다.
저는 55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 아주머니의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왜 그 아주머니는 새벽기도에만 참여했을까요? 그 아주머니는 늘 남루한 옷을 걸치고 다녔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아니면 주일헌금이 부담되었을까요? 왜 가난한 새우젓 장수 아주머니는 대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을까요?
가난하기 때문에 예배드리러 가기를 꺼린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부자들과 지배자들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출석을 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중산층과 상류층이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허락된 복음을 선포하기보다는 부자들을 위해 위조된 사이비 복음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부자들과 권력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는 수호신으로 둔갑합니다. 그런 예수님이라면 결코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위해서는 사순절은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교회들도 더 이상 그들의 걸림돌이 아닙니다. 이제는 교회들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어버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주님의 교회일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만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걸림돌이 될 때에만, 참된 교회일 수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 절기에 우리는 과연,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로 살아가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신 그 예수님을 다시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 예수님만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따르려 합니까?
요한은 예수께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는 결코 다른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신 예수님만을 우리의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받은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는 주님처럼 마땅히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사역에 연대하는 삶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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