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응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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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소서!”
2011-12-04 21:17:28
윤응진
조회수   3431

한신대 대학교회 설교
2011.12.4.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소서!”


누가 1:5-20, 79(절)


  1. 들어가는 말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준비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 배후에는 사건을 지휘, 감독하시는 하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행한 그의 활동을 통해서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세례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한의 탄생 자체가 기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뜻밖의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이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세례요한의 탄생이 지니는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2. 세례요한의 탄생이 지니는 충격적 의미


누가복음은 제사장직과 성전봉사, 아론의 후계 등에 대하여 상세히 언급함으로써,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제사장들은 24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 제사장 집단은 4~9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큰 세 절기를 제외하고, 각 제사장은 매년 두 주일씩 성전에서 제사 업무를 수행하였다.


아비야 제사장 그룹은 여덟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사가랴는 이 그룹에 속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가급적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도록 권장되었습니다. 사가랴의 아내가 ‘아론의 딸’이라는 것은 ‘제사장의 딸’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름은 대개 경건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비야’라는 이름은 “야훼가 아버지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스가랴’라는 이름은 구약에 흔한 이름인데, “야훼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은 “나의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닌 이름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6절 말씀에 따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들이었으므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경건한 사람이 자녀가 없다는 것은 모순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자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표징이었고, 반면에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큰 저주이며 천벌을 받은 표시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삶을 살고 있는 제사장 부부가 일반인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조차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부부는 둘 다 “나이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기적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천사가 아기의 탄생을 예고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성전에서 행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직무는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 사회에는 제사장이 약 18,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제비를 뽑아서 업무를 분배하였는데, 분향은 한 제사장이 평생 한 번만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분향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생에 한번 오기 힘든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하는 동안에 군중들이 밖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제사가 저녁 때 드리는 제사임을 암시합니다.


분향단은 성소 중앙에 있었습니다. 사가랴의 임무는 뜨겁게 달궈진 제단에 향을 집어넣고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 그는 분향단 곁에 나타난 천사를 보았습니다.


성서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종종 천사들을 통해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사건에도 천사들이 등장합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돕는 수행원들입니다. 천사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사가랴는 천사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은 사가랴에게 더 큰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님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그 아들은 네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많은 사람이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13-14).


천사가 전한 소식은 사가랴가 전혀 기대하지 못한 뜻밖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간구를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가랴의 기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리 아들이 없는 것이 그에게 수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일생에 단 한 번 얻기도 힘든 분양 업무에서 개인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추측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이미 늙어서 아들을 낳을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1:18). 게다가 저녁에 드리는 제사는 으레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구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일반적인 기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 메시아가 오게 하소서, 당신의 백성을 도우소서!” 그러므로 사가랴의 간구도 메시아가 오기를, 그래서 구원의 시대가 열리기를 간청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사가랴의 간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청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사가랴의 이름(“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과 엘리자벳의 이름(“나의 하나님이 약속하셨다”)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가랴는 그 약속의 성취과정에 합류하게 됩니다. 바로 메시아 탄생이라는 위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사가랴는 아들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메시아의 시대를 여는 선봉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으로 태어나서 구원의 역사에 일익을 담당할 아들의 아버지로서 사가랴는 구원의 시대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사가랴의 아들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녀야 했습니다. 본래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보통 아버지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시해주신 것은 그 아이의 특별한 위치를 지적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이라는 아들의 이름은 그의 부모들이 지닌 이름들에 담겨진 갈망에 대한 대답과도 같습니다.


세례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경험함으로써 일어나는 기쁨과 행복을 의미합니다. 사가랴의 기쁨은 단순히 자신의 아들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위해서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담당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쁨은 메시아를 고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게 될 기쁨입니다. 이처럼 개인의 소망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역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이 행하게 될 모든 것은 메시아와의 관계로부터 의미와 탁월함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가 해야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것(1:17)입니다. 즉 부모와 자녀가 서로 화해하고 이웃끼리 서로 화해하여 평화와 정의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이 놀라운 약속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가 모두 “늙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헌신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상식 수준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천사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소개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인데, 나는 네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보내심을 받았다”(19). ‘가브리엘’ 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의 임무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은 하나님의 약속인 셈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약속이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표징’으로 사가랴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62절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에게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는 벙어리일 뿐만 아니라 귀머거리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그는 아들의 탄생과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사가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고 그토록 소망하던 아들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여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지도 못하고 침묵을 지켜야 하는 처지에 대하여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3. 사가랴의 노래


마침내 요한이 탄생했습니다. 이웃사람들과 친척들은 늙은 부부가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에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의 기쁨은 이웃들의 기쁨과는 다른, 특수한 기쁨이었습니다. 이웃들의 기쁨은 세속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나, 사가랴의 기쁨은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되었을 때, 첫 마디는 이웃에게 두려움을 주는 뜻밖의 찬양이었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능력 있는 구원자를 자기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68-69).


이것은 아들을 얻은 여느 아버지의 환호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가랴의 노래에는 구약성서의 핵심내용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잦은 배신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에게 했던 언약을 기억하시고 마침내 메시아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성탄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가랴는 마치 메시아의 성탄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의 노래는 성탄의 의미를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탄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원수들로부터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74-75).


원수들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지니고 있는 희망을 무효로 만들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괴하고, 믿음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들입니다. 외적인 원수들은 바로 로마제국과 그 제국의 앞잡이인 헤롯대왕과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백성들의 삶에 짙게 드리운 암흑과 죽음의 하수인들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메시아를 통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암흑과 죽음을 몰아내고, 원수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되찾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이처럼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원수들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저질렀던 죄악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평생을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삶이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의무를 표명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는 거룩하게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의롭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에베소서 4:24).


사가랴는 메시아의 성탄으로 인하여 시작될 새로운 구원의 현실을 매우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78-79).


요한은, 이처럼 새롭게 시작되는 메시아의 시대를 알리는 전령과 같은 예언자가 될 것입니다. 전령은 왕보다 앞서 달려갑니다. 전령은 인파가 많은 좁은 길을 달리며 마차나 가마를 타고 행차하는 왕을 위해 길을 비키라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왕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하라고 소리칩니다. 이런 전령의 역할은 왕이 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바로 그런 전령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탄생과 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백성들보다 먼저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77). 지금 사가랴는 그 전령의 역할을 할 아들이 탄생한 것에 대하여 ‘특별한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4. 평화의 길로 인도하소서!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사가랴의 노래는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메시아가 열어갈 ‘평화의 길’은 억압과 폭력으로 유지되던 ‘로마의 평화’를 거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예언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동시에 비장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결국 요한도, 예수님도 그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자들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평화’에 맞서서 ‘하나님의 평화’가 기필코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 바로 성탄절은 이 ‘하나님의 평화’를 갈망하는 계절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로마의 평화’에 저항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로마의 평화’는 ‘미국의 평화’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미국은 온 세상을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 아래에 두려 합니다. 때로는 폭력으로, 때로는 협정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22일에 한나라당은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강행처리하였습니다. 이를 규탄하는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이번에 날치기 된 한미 FTA는 ‘뼛속까지 친미, 친일’인 대통령과 ‘검은머리 미국인’인 통상관료들이 만들어 낸 최악의 매국 협정”이라고 규정하고, “쿠데타로 통과한 비준안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 부장판사는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과 통상 관리들이 서민과 나라살림을 팔아먹은 2011년 11월22일, 나는 이날을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과 관료들, 그리고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미국의 입맛에 맞추어 협정을 처리한 것에 대한 저항입니다.


아마도 대통령을 향하여 “뼛속까지 친미”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시위대나 한 부장판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대통령의 친형이 미국 대사에게 실토한 것이었습니다.


 2008년 5월29일, 이 대통령 취임 석 달 뒤인 그날 새벽 2시11분. 당시 주한 미국대사 알렉산더 버시바우는 본국 정부에 보낼 보고서 작성을 완료했습니다. 그는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한국 정부가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를 푸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결정적 구실을 할 것이라고 (대통령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은 강조했다. 이 부의장은 이 대통령이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어서(pro-U.S. and pro-Japan to the core) 대통령의 시각(vision, 대미·대일관)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 이 부의장은 새 국회의 핵심 임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과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과 여당이 우리의 이익을 대표하지 않고 미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판사들은 그들이 한국의 사법주권마저 미국에 넘겨버렸다고 저항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미국식 기독교가 이식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도 대통령 못지않게 “뼛속까지 친미” 노선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장로인 대통령이 “뼛속까지 친미”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의 수치이며 재앙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던 사가랴의 노래를 통해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성탄절은 ‘로마의 평화’를 견고하게 해 줄, 지배자들과 부자들의 수호신이 탄생하는 것을 기다리는 계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 의해 형성된 “어둠과 죽음의 그늘아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해방시키러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미국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가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계절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하게 된 농민들의 편에 서서 저항하여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스스로가 “뼛속까지 친미”노선을 걷던 길에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뼛속까지 친미”노선을 걷고 있는 대통령과 관료들, 그리고 여당을 향해서 타협 없는 저항의 깃발을 높이 올려야 할 것입니다. 이 국가적 재앙 앞에서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대통령과 집권여당을 향해 저항하지 않는다면, 올해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연례적 종교행사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늙은 사가랴처럼 무기력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을 경험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처럼 그 주님께서 오시도록 그길을 예비하여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우리들 자신이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지식”에 함께 참여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께는 거룩하게,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정의롭게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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