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때쯤 성지순례를 갔었는데요. 주일예배 설교는 노회 원로목사님께, 수요저녁기도회는 시무장로님께 <낭독 설교>를 부탁드렸습니다. 제가 작성한 A4 양면 분량의 설교문을 장로님이 대독하셨지요.
특이한 방식 같지만, 고신대 변종길 교수님 글을 보면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지금도 행해지는 전통이라고 합니다.
목사가 없는 교회이거나 설교자를 구할 수 없을 때에는 장로가 강단에 올라가서 다른 목사의 설교를 대신 “낭독”한다. 이런 경우의 예배를 소위 “낭독예배”라고 부르는데, 어떤 교단에서는 설교자가 매우 부족하여 태반이 넘는 교회에서 “낭독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때 장로들이 여럿 있을 경우 그 중에서 경건하며 낭독을 잘하는 분이 올라가서 낭독하는데, 사전에 연습을 많이 해서 제법 손짓도 하며 억양도 넣고 해서 목사의 설교 못지 않게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화란에서는 오래 전부터 출판사에서 정기적으로 좋은 설교들을 모아서 출판하여 낭독예배를 도와주고 있다. 필자가 참석한 어떤 예배에서는 무려 7,80년전의 어떤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낭독하는데, 그 내용의 깊이와 경건함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은 적이 있다. (변종길, 「화란개혁교회의 장로직제」)
이종표목사님의 『캐나다 개혁교회 체험기』 13장의 낭독설교에도 이 전통이 나옵니다. 설교자에게 한 주에 최대 두 번의 설교만을 부탁하고 나머지는 낭독 설교를 하는 등 쉼을 주려고 애쓴다고 하네요. 역시 화란개혁교회의 유산인 듯 보입니다.
유튜브 시대이니, 현장 설교를 할 수 없을 때는 녹화한 후 영상을 ‘트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1) 현장 예배로서 차별화가 필요하고 (2) 장로님께 고유의 역할을 부여해 드리고 (3) “낭독의 힘”을 활용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낭독설교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 교회에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권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요. 낭독설교할 때 비로소 설교자로서 교인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고 있다는 뿌듯함같은 것을 느끼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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