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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7일 (금) 일점일획_"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묵상(우진성)(IBP)
2026-03-27 00:01:41
묵상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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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묵상(우진성)

사순절 고난주간으로 이어지는 때에 "그리스도의 몸"을 묵상한다. 

 

어려워진 비유 언어

 

교회를 비유하는 대표적인 비유 언어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헬라어로는 σῶμα Χριστοῦ(소마 크리스투)이다. 이 표현은 바울 사도의 서신들(고린도전서, 로마서, 에베소서, 골로새서)에 거듭 등장하는데, 가장 이른 편지 속 표현은 고린도전서 12장 27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Ὑμεῖς ἐστε σῶμα Χριστοῦ 휘메이스 에스테 소마 크리스투)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하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는 교회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그 이미지는 구체적인가? 아니면 모호한가?  

비유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원관념에 해당하는 사물(비유되는)을 보조관념(비유하는)을 사용하여 선명하고 감각적으로 설명하는 수사학 기법이다. 보조관념이 원관념에 비해 선명하고 직관적으로 독자에게 와 닿아야 비유로서의 기능을 다한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라고 노래할 때, "내 마음"은 원관념으로 설명이 쉽지 않은 것이고, "호수"는 보조관념으로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이미지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할 때, "교회"가 원관념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보조관념이다. 안타까운 점은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보조관념이 "교회"라는 원관념보다 결코 선명하거나 직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표현이 되었다. 

1세기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은 그렇지 않았으리라. "그리스도의 몸"을 들었을 때, "그리스도의 몸"이 담고 있는 특징을 즉시 이해하고, 그 특징을 "교회"에 적용함으로 새롭게 시작된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바울 사도는 이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고린도전서 12장의 "그리스도의 몸" 설명

 

고린도전서가 가장 먼저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칭하였다. 12장에 "그리스도의 몸" 신학이 전개되는데, 13절을 읽으면 이렇다. 한글 성경은 새번역이든 개역개정이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부분을 앞세우지만, 원문은 그렇지 않고 이렇게 시작한다. 

 

ἐν ἑνὶ πνεύματι(엔 헤니 푸튜마티) 한 성령 안에서 

ἡμεῖς πάντες(헤메이스 판테스) 우리 모두는

εἰς ἓν σῶμα(에이스 헨 소마) 한 몸을 향하여

ἐβαπτίσθημεν(에밥티스쎄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첫 문장에서 분명하게 강조되는 것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한 몸"이 단순한 하나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스도의 몸" 담론이 세례와 연관지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점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몸"은 세례 안에서 제시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해야 한다. 

세례에서 제시된 그리스도의 몸은 어떤 몸인가? 로마서 6장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나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모두 그의 몸에 일어난 일이다. 세례에서 제시된 그리스도의 몸은 먼저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몸/찢긴 몸이고, 다음으로는 부활하여 다시 사신 몸이다.  

 

성례전 안에서 상징화/제의화된 그리스도의 몸

 

고린도전서의 "그리스도의 몸" 설명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당시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모임 속에서 늘 접하던 "그리스도의 몸"과 연관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바울 사도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고전 12:27)라고 고린도 교회에 말했을 때, 이를 들은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만약 고린도교인들이 십자가 사건을 목도한 증인들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을 듣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당한 몸이 떠올랐을 것이며, 죽음 이후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진 찢겨진 몸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동시대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만나는 경험은 어디에서 일어났던 것일까? "그리스도의 몸"을 들었을 때 (비유의 보조관념으로 사용될만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만큼 이에 친숙한 경험의 원천은 어디였을까?  

우리는 세례와 성찬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초대교회의 성례전이었던 세례와 성찬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배경으로 제정되었다. 성례전이 행해질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은 언급되었고, 기억되었고, 해석되었고, 본으로 제시되었다. 역사적인 몸을 본적은 없지만 그로부터 출발한 성례전을 통하여,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친숙했다.  

 

세례 속 그리스도의 몸

 

세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이어가 보자. 세례는 일회적 성례이지만 입교 의식이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이미지는 강렬하게 다가갔을 것이다. 세례를 받는 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도록 초청 받는다. 세례는 주로 죽음과 연결된다. 죽어야 부활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갈라디아서 3장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다(28절). 유대 사람, 그리스 사람, 종, 자유인, 남자, 여자였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모두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27절)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기 위해서는 내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 벗음은 죽음을 상징하는 비유적 언어이다. 나의 옛사람에게 죽음을 선포한 후 그리스도로 옷입게 된다. 이 죽음-부활의 경험은 세례 안에서 참여자의 몸에 경험된다. 로마서 역시 같은 관점으로 세례를 설명한다.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롬 6:5) 로마서 6장의 세례 담론 가운데 이런 구절도 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6-7절)

 

세례 받은 이들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하여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 이런 죽음을 "자기 중심적인 나"의 죽음이라 명명할 수 있다. 세례 경험 속 "그리스도의 몸"은 이러한 죽음의 본을 보인 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몸을 굴복시켜 죽으셨고, 또한 다시 사셔서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셨다.(롬 6:9)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죽음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같은 몸의 부활을 확신한다. 

 

성찬 속 그리스도의 몸

 

세례가 자기중심적 나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성찬에는 친구를 위하여 생명을 나누는 사랑으로서의 죽음이 강조되어 있다. 사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장면은 주님의 식탁에서 빵을 나누는 장면이다. 초대교회의 예배였던 주님의 식탁에서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몸에는 친구를 위하여 나누는 생명이 담겨 있었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막 14:22)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혹은 위하여 깨어진)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고전 11:24, 눅 22:19)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 26:26)

  

이와 같은 언어들이 모일 때마다 반복되었기 때문에,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성찬을 통해 기억되는 "그리스도의 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나눈 것은 빵이 아니라, 빵으로 상징된/제의화된 "그리스도의 몸"이었고, 그 몸은 친구를 위하여 기꺼이 내어주는 생명의 표현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와 같이 성례전 속에서 상징화/제의화된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된 언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받는 성찬에 참여하며 그리스도께서 본 보이신 사랑으로 살 것을 다짐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성례전에서 상징화된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성경의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로마 문화 속 "몸 유기체"론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그리스-로마 문화 속의 몸 비유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몸에 관한 비유로 널리 알려진 비유는 이솝 우화의 한 자락인 "배와 지체의 우화"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손과 입 등의 신체 부위들은 매일 부지런히 움직여 음식을 구하고 씹어 배로 보내는데, 배는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한다고 신체 부위들이 불평한다. 화가 난 손과 발 등의 신체 부위들은 더 이상 음식을 공급하지 않기로 하였다. 며칠이 지났는데, 야위고 힘이 빠진 것은 배만이 아니었다. 온 몸이 시들시들해졌다. 이 우화의 교훈은 배가 아무 일을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부위를 위하여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서로 인정하고 서로 돕지 않으면 함께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 사람 이솝이 서로를 인정하고 도와야 한다는 일반적 교훈을 우화로 말했다면, 기원전 5세기 사람 메네니우스 아그리파는 이 우화를 구체적 정치 상황 속에서 인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성산 사건"은 기원전 494년 로마 공화정 초기에 일어난 평민들의 파업 사건이다. 평민들은 전쟁에 나가 피를 흘렸지만, 돌아오면 빚더미에 앉아 노예가 되거나 감옥에 갇히기 일쑤인 반면, 귀족들은 모든 정치 권력과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평민들이 무기를 들고 로마 시를 빠져나가 근처의 성산(Mons Sacer)이라 불리는 곳에 진을 치고 일종의 파업을 감행하였다. 이때 아그리파가 이솝의 '배와 지체' 우화를 연설의 내용으로 사용하여 분노한 평민들을 설득하였다. 이 상황 속에서 우화는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었다. 배로 비유된 원로원 귀족들이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고, 그들이 양분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만 로마 전체가 살 수 있다는 논리였다. 

보편적 교훈을 주던 이솝의 몸 우화는, 로마 공화정 초기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한 몸으로 연결된 유기체라는 점을 명분으로 귀족을 두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더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대체로 이와 같다. 고대 사회에서 유기체로서의 몸 비유는 황제나 귀족의 자리를 확고하게할 수 있도록 대중을 설득하는 역할을 하였다. 꼼꼼히 읽지 않으면 바울 사도의 "그리스도의 몸" 언어도 그렇게 읽힐 위험이 있다. 

 

정리해 보자.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은 세례 속에서 경험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찬을 통하여 경험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 몸은 자기 중심적 나를 죽인 몸이요, 친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몸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라고 선포했을 때, 세례와 성찬 속의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때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 닮은 몸이요, 그리스도 본받는 몸이요, 그리스도와 하나인 몸이다. 그런 몸을 이룬 지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 사도가 말하는 답은 이와 같다.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 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12:23)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습니다.(12:24)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2:26)

 

자기 중심성을 이겨내고 서로 사랑으로 나아가는 몸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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