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등감
산사에서 오랫동안 수행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낸 고승이 모처럼 탁발수도를 나섰다. 얼굴에는 광체가 있고 그 걸음걸이는 기품이 있었다. 그의 뒤를 두 명의 제자가 따르고 있었다. 그 고승이 대갓집 문 앞에서 밥 빌어먹기를 청했다. 그런데 그 집 하인이 마침 심사가 뒤틀렸던지 문을 박차고 나와 그 고승을 개 패듯 두들겼다. 물론 말리던 제자들도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유 없이 매 맞아 씩씩 거리는 제자들을 향해서 실컷 두들겨 맞은 고승이 말한다.
“내가 이제 중이 된듯하네 중이라면 마땅히 매 맞는 천민이어야지.”
수행하는 중이 존경만 받아서야 어디 수행자겠는가? 때로는 멸시와 천대도 받을 수 있어야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없는 존경을 받으신 분이지만 참 수모도 많이 당하신 분이다. 바울선생님도 제자들에게는 한없는 존경을 받는 분이었지만 수없이 매 맞고, 쫓겨나고 도망 다니는 수모를 겪고 결국은 순교하셨다.
산속 고승이 산속에만 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세상에 내려와서 설법을 하던지 천하게 매 맞던지 해야지. 참 설법을 하면 매 맞게 되어 있다. 목사가 대접만 받으면 무슨 목사인가? 수모당하고 쫓겨나기도 해야지. 대접만 받으면 어떻게 천국에 가겠는가? 참말을 해야지. 참말하고 그 대가로 멸시 천대 받고는 “주님도 이렇게 멸시 천대를 당하셨지”하면서 즐거워 할 수 있어야지.
내가 몇 년 어간에 진짜 목사가 되는듯하다. 전에는 내가 수모를 당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수모를 당하고 산다. 내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길 중에 멸시와 천대의 눈길이 느껴진다. 전 같으면 자존심 꼿꼿하게 세우고 말 펀치를 날렸을 것인데 그만두고 그냥 수모를 묵묵히 견디고 있다. 바울선생이 당한 수모, 예수님이 받은 수모를 생각해서 나도 수모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감수하고 있다.
누가 나에게 수모를 줄까? 나는 분명히 수모를 느끼고 있는데 사실은 아무도 나에게 수모를 주지 않는다. 내 스스로가 수모를 당하고 있다. 열등감이다. 전에는 그 열등감을 객기로 극복했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객기를 부릴 수도 없고… 내 열등감이 나에게 한없는 수모를 준다.
열등감이라는 것은 참 더럽다. 사람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고 비굴하게도 만들며 때로는 과격하고 폭력적이게도 한다. 쓸데없이 고집도 부리고 때로는 열등감이 큰 만큼 오만해 지기도 한다.
언제쯤 이 더러운 열등감에서 벗어날까?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하늘을 원망치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겠다.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이구나!”(논어 헌문 37장)고 자위했다. 나도 공자처럼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되지!” 하고 위안 받을 수도 있겠지만 참 영악하게도 나는 공자의 이 말에서 열등감에 몸부림치는 공자의 모습을 상상한다.
나는 나의 열등감을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오히려 내 열등감이 만들어내는 수모를 즐겨야겠다. 이러한 내 모습을 보시고 주님이 불쌍히 여기실 것 같다. 나는 감히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심을 바라고 있다.
-김홍한 목사의 <십자가 묵상 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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